“괜찮아”라고 말하면서도 표정은 어두운 사람,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끝내 입을 다무는 사람. 우리는 종종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마주하게 됩니다. 감정 표현이 서툰 것은 단순히 말주변의 문제가 아니라, 억압된 감정, 낮은 정서 인식, 표현에 대한 두려움 등 심리적인 요인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감정 표현이 어려운 사람들의 심리적 특징과 그 원인을 알아보고, 어떻게 하면 더 건강하게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지 살펴봅니다.
감정을 억누르는 습관의 시작, 억압
감정 표현이 어려운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억압은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채 감정을 무의식적으로 눌러버리는 심리적 방어기제 중 하나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울면 안 돼”, “참아야 돼”, “조용히 있어야 착한 아이야” 같은 메시지를 받으며 자랐을 가능성이 큽니다.
감정 표현은 사회화 과정에서 학습되는데, 감정을 드러냈을 때 혼나거나 외면당한 경험이 반복되면, 사람은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느끼게 됩니다. 이로 인해 기쁨, 슬픔, 분노, 불안 같은 다양한 감정이 억제되며, 외부적으로는 ‘무표정’하거나 ‘항상 괜찮은 척’하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문제는 억압된 감정이 사라지지 않고 내부에 남아 스트레스로 전환된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감정의 내재화’라고 하며, 장기적으로는 만성 피로, 두통, 소화불량 같은 신체적 증상이나, 우울과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
결국 감정을 억누르는 습관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무의식적 선택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심리적 부담을 키우는 요인이 됩니다.
감정을 몰라서 표현 못 하는 경우: 정서 인식의 부족
감정 표현이 서툰 또 다른 이유는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스스로도 잘 모르는 경우입니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정서 인식 부족(alexithymia)이라고 하며, 감정의 이름을 붙이거나 내면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지금 기분이 어때?"라는 질문에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감정을 느끼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 인지하거나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래서 감정이 올라오더라도 표현하거나 공유하는 데 한계가 생깁니다.
이러한 정서 인식 부족은 자신과의 관계는 물론, 타인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면 오해가 쌓이고, 감정적 교류가 단절되며, 깊은 관계 형성이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또한 정서 인식이 낮은 사람은 자신의 욕구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해, 스스로를 돌보는 데도 한계가 생깁니다.
정서 인식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학습되고 훈련될 수 있습니다. 감정일기 쓰기, 자신의 하루를 감정 중심으로 회고하기, 감정 단어 익히기 등 작은 실천을 통해 감정을 더 정확히 인식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표현불안: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두려운 마음
감정을 억압하거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넘어서, 감정을 표현하는 것 자체에 두려움을 느끼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를 심리학적으로는 표현불안(emotional expression anxiety)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감정을 표현했을 때 생길 수 있는 부정적 반응—예를 들어 오해, 갈등, 비난, 관계 단절—을 걱정하며,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쪽을 선택합니다.
표현불안이 있는 사람들은 감정 자체보다는 ‘감정을 드러냈을 때 생길 수 있는 결과’를 두려워합니다. “이 말을 하면 상대가 상처받지 않을까?”, “감정을 드러내면 약해 보일까?”, “오히려 관계가 어색해지면 어쩌지?”와 같은 불안이 앞서는 것입니다. 이들은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에서 감정을 숨기기도 하지만, 사실은 거절당할까 봐, 외면당할까 봐 자신을 보호하려는 심리적 방어입니다.
이러한 표현불안은 대인관계에서의 거리감을 만들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게 하며, 결국에는 소외감이나 외로움을 키울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했을 때 관계가 더 깊어지고 오해가 줄어드는 경험이 반복되면, 표현에 대한 두려움도 점차 줄어듭니다.
감정을 표현하는 연습은 작은 말 한마디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 조금 속상했어”, “이 말 들으니까 기뻐”, “조금 서운했지만 이해해”와 같이 간단하지만 진솔한 감정 표현은 나를 드러내는 동시에 상대와의 신뢰도 쌓아가는 출발점이 됩니다.
결론: 감정은 표현할수록 건강해진다
감정 표현이 서툴다는 것은 약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과거의 경험, 정서 인식의 미성숙, 표현에 대한 두려움이 쌓인 결과일 수 있습니다. 감정은 억누르거나 숨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나를 이해하고 소통하기 위한 중요한 도구입니다.
감정을 표현한다고 해서 무조건 갈등이 생기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표현을 통해 더 깊은 관계와 자기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나는 감정을 잘 못 표현해”라고 단정 짓기보다는, 오늘 하루의 감정을 솔직하게 써보는 작은 연습부터 시작해보세요. 감정을 표현하는 힘은 결국, 나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됩니다.